요전에 고등학교 역사관련 교과서(아마 세계사였던 것 같다)를 서점에서 무심코 펼쳤을 때, 제일 첫 챕터 이름에 난 너무 놀랐다.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이 챕터 제목이었기 때문에. 내가 배운 세계사 책도 이거였으면 좋았을걸 하고 부러워했다. 삶을 요약하는 가장 포괄적인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이 이 이야기도 그 세 가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독특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시간을 뒤틀었기 때문일거다. 그리고 뒤틀린 시간 안에서의  공간과 인간을 본다. (결국 난 별로 안 독특하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

시간이동은 SF에서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은 SF일까? 시간을 이동한다고 해서 모두 다 SF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로 내가 생각하기에 이 책은 SF가 아니다. 초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에 맞춰져 있고 다만 시간 이동은 소재를 제공한 것으로 역할을 다했다. 어째서 열일곱의 아이가 마흔둘의 사람이 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본인이 아닌 타인은 이런 상황을 기억상실로 이해하지 않을까? 모두에게 시간이 공평하게 흐르지 않듯 주인공의 상대적 시간이 이동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특정 시기의 기억 상실로 이해할거다. 여기선 기억상실은 아니라는 게 전제되어 있지만. 이유는 '열일곱 마지막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정도인것 같다. 열일곱 무렵의 생생한 추억으로 마흔의 독자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이 이 책의 일본에서 거둔 성공비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어쨌든 저런 소재로 시간을 옮겨놓고 주인공이 시간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렸다. 주인공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극히 모범적이다. 모범적이라 함은 흔히 소설 주인공이 그렇기 쉬운 긍정적이고 밝은 마음자세와 적극적인 생활태도 등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썼다. 그리고 그 자세로 갑자기 닥쳐온 시간의 불연속을 꿋꿋하게 살아나간다. 요약하자면 이게 끝. 누구의 삶이든 요약하면 태어나서 살다 죽는 걸로 끝나지만 이 책은 정말 요약해 봐야 필요가 없다. 그냥 책을 들고 읽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의 연속성을 누리지 못했던 주인공이 겪은 시간의 불연속(0에서 시작해서 트랙 17까지 기록된 오페라 테이프를 잘라 트랙42와 연결한 후 플레이. 트랙 18부터 41까지의 내용은 42부터의 내용을 곱씹고 옆사람에게 물어보고 직접 부딧치면서 알아갈 수밖에 없다)을 느끼고 공감하고 책을 덮으라는 말밖에 해줄게 없다. 불연속의 접점에서 그렇게까지 의연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조금 경이롭기까지 했다는 것과, 친구 마유미가 마흔둘부터 다시 시작된 삶의 서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은것 같다는 감상을 덧붙인다. 나이를 먹는다 해서 사람이 완전히 바뀌진 않지만, 표류하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아래는 본문 중에 기억에 남는 부분을 다시 찾아서 옮겨 적어놓은 것.

이를테면 나는 하나의 이야기다. 인간은 누구나 한 권의 책인 것처럼.
그러나 그 책이 낙장인 경우엔 누구에게 교환해달라고 해야 하는지. 교환이 불가능하다면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책을 내던져 버리든가, 아니면 그대로 계속 읽어나가든가. 다만 한 권밖에 없는 책은 버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치가 맞지 않더라도 페이지를 계속해서 넘길 수밖에. p128

어제라는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내일이라는 시간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지금이 존재한다.
사쿠라기 마리코가 된 이치노세 마리코의 말.p524


내가 이 책에 별점을 준다면. 세개 정도. 전체 3개의 시리즈(스킵, 턴, 리셋)으로 되어있다는데 - 왠지 링 시리즈 생각이 났다 - 아직 뒤의 두 개는 출판되지 않은 모양이다. 뒷 시리즈 읽어보고 싶다. 책은 무려 540페이지를 넘는 두꺼운 책이고, 종이질 좋다. 근데 무겁다. 장평 좀 줄여주면 안되겠니 라는 절규를 하고싶다. 종이값도 아끼고 페이지도 줄고 가벼워지고 좋지 않니 ㅠ_ㅠ;; 이건 요새 거의 모든 책에 갖는 불만 같다. 굳이 사서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던것 같다(도서전에서 봐서 샀겠지만). 집에 이런 책 류는 거의 없으니 괜찮지 않나 싶기도 하고. 혹시 또 몇 년 지나서 다시 읽어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덧. 만약에 내가 마흔의 나이이고, 내가 열일곱 시절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와 그 열일곱의 아이가 내 나이 마흔즈음으로 시간이동해서 사고방식과 생활의 변화를 체험하고 극복하는 이야기라면. 그러니까 각주로 숱하게 달려 있는 문화적 시간의 키워드들이 실제로 내가 각주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시간을 살아 느끼고 겪었다면,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무척 달라졌을 것은 당연하다. 일본의 문화적 키워드들을 한국인인 내가 공감하기는 어렵고, 시기도 다르기까지 해서 깊숙히 배경이 되는 그런 요소들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별로 좋은 느낌을 갖기가 힘들다. 이 책이 일본에서 넓은 연령층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이해 아니 어쩌면 당연하다고까지 생각하지만 외국인인 나의 시점에선 그 부분까지 공유하지 못해서 책을 제대로 읽은 것 같지 않다. '아 맞다, 그땐 그랬었지-' 라면서 친근한 공감을 느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 못했거든. 그나마 주신구라라던가 몇몇 드라마나 일기일회 같은 건 알아먹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이 책 독자들-특히 마흔 무렵의 여독자들-이 느꼈을 감정이 조금 상상되는 것 같아서 그들이 약간 많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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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8 00:00 2006/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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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elius  2006/07/07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최근에 이 책 봤습니다. 여느 책과는 달리 저도 이 책의 주인공 같은 경우에 처하면 어찌 할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혹시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미적 미적 40대의 삶을 살았을 것 같더군요. ^^

    p.s. 말씀하신대로 책이 너무 무거워서 가지고 다니면서 보느라 고생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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